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해태 타이거즈 (문단 편집) === 1983년~1985년 === ||<-2> '''{{{#ffffff 캐치프레이즈}}}''' || || {{{#ffffff 1983년~2001년}}} || '''꿈을 심는 해태! 용맹스런 타이거즈!'''[* [[무등 야구장]] 1루 덕아웃 옆에 캐치프레이즈 문구가 새겨진 현수막이 항상 걸려 있었다.] || [[http://vod.kbs.co.kr/index.html?source=episode&sname=vod&stype=vod&program_code=T2019-0296&program_id=PS-2019193742-01-000§ion_code=05&broadcast_complete_yn=N&local_station_code=00§ion_sub_code=08#more|KBS 아카이브 프로젝트 모던코리아 제 5편 왕조(2020.02.13) 이 문서를 보면서 같이 보는 것을 추천한다.]] 1983년 미국에서 야구 유학[* 요즘처럼 [[메이저리그 베이스볼]] 팀의 코칭스태프로 활동하는 것 등과는 꽤 거리가 먼 것이었다. 1981년 국가대표팀 감독을 역임했지만 여전히 만 40세가 채 되지 않았던 김응용은 미국 [[조지아 주]]의 서든 칼리지에 학생으로 입학하는 한편 학교 야구부의 보조 코치를 자청했다. 말하자면 그는 대학야구의 한 구성원이자 조교쯤 되는 위치에서 미국 야구의 가장 낮은 단계에서 길지 않은 시간을 머물다 온 셈이었고 오늘날 관점에서 보자면 선진국 야구를 배우고 돌아왔다는 설명이 민망할 정도로 유치한 경력일 수 있다.]을 마치고 돌아온 [[김응용]] 감독이 4,800만원의 계약금과 연봉을 합친 금액에 부대조건으로 승용차 한대를 받고 해태 2대 감독으로 취임하여 대대적인 팀 개편에 들어갔다. 먼저 조창수와 유남호를 필두로 한 기존의 코치진에 군산상고 감독 출신 [[백기성]]을 영입해 코칭스태프를 강화했다. 그 외에도 부족했던 선수를 보강하기 위해 삼성에서 벤치로 밀려나있던 [[서정환]]을 현금 트레이드로 영입했고[* 여담으로 이 트레이드는 '''한국 프로 야구 사상 첫 선수 트레이드'''로 역사에 남아 있다.] [[재일교포]] 선수인 포수 [[김무종]]과 언더스로 투수 [[주동식]]을 영입해 팀의 약점인 배터리를 든든하게 했다. 1983년부터 재일동포를 비롯해 해외에서 뛰고 있는 해외파 선수에 대한 영입이 시작되었는데 해태 구단은 영입 작업에 진통이 있었다. 가장 먼저 점찍은 것은 멕시코에서 뛰고 있던 [[이원국]]이었지만 결국 계약금과 연봉에 이견을 좁히지 못했던 것이다. 계약금과 연봉 을 합해 7,400만원 그리고 15승을 넘을 경우 2,000만원의 인센티브를 주겠다는 제안을 했지만 이원국이 요구한 것은 기본 1억 2,000만원에 20승을 넘기거나 평균자책점 2.0 이하의 성적을 낼 경우 추가로 1500만원씩의 인센티브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너무 나이가 많아 얼마나 오래 선수 생활을 할지 모르는 선수에게 그렇게 큰 돈을 쓸 수 없다며 영입을 최종적으로 포기한다. 대신 잡은 선수는 [[주동식]]이었다. 나이는 이원국보다 한 살 많고 [[장명부]]보다 기록이 한참 처졌지만 계약금과 연봉을 합해 7천만 원만 투자하면 부담없는 선택이라는 매력이 있었다. 1억 4,500만원으로 삼미로 간 장명부의 절반도 안되는 액수였다. 물론 1982년 실업 야구 최우수 신인 투수상을 받은 박동경과 최우수 신인 타자상을 받은 양승호에게 계약금과 연봉 각 1200만원을 주고 영입한 것을 비롯해 원년에는 단 한 명도 없었던 왼손타자 [[송일섭]]과 [[김일환(1954)|김일환]]을 영입하는 등 10명의 선수들을 충원하긴 했다. 하지만 국가대표와 해외파에서 눈에 띌 만한 재목을 끌어오지 못한 해태 타이거즈의 행보는 누가 보기에도 초라했고 사실상 가장 유력한 꼴찌후보로 지목되고 있었다. 하지만 그 결과 1983년 들어 해태는 시즌 전 하위권 전력이라던 전문가들의 예상을 뒤엎고 부임 첫 해에 팀을 전기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는데 6월 초까지 장명부를 앞세운 삼미와 1위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치락을 거듭했고 2.5게임차로 뒤진 가운데 6월 7일부터 열린 광주 3연전 맞대결을 싹쓸이하며 단독 1위로 올라섰다.[* 이때 광주 시민들이 밤중에 삼미 선수들의 숙소로 가서 꽹과리를 두드리거나 고성을 지르는 등 휴식을 방해했고 이것도 해태의 3연전 싹쓸이에 한몫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4일 삼미가 OB에게 패하면서 해태는 남은 경기와 관계없이 한국시리즈 직행을 확정 짓게 되었다. 바야흐로 타이거즈의 전성시대가 시작되었다. 한편 김응용 감독은 [[스파르타]]식 훈련을 앞세운 전임 감독과는 정반대로 팀 훈련 외 시간은 철저하게 선수들의 자율에 맡겼다. 단체 훈련도 하루 3시간을 넘기는 일이 드물었다. 1983년 6월 25일 당시 신문기사를 보면 김응룡 감독은 "프로 선수에겐 결점 보완의 처방만이 필요한 게 아닙니다. 훈련은 각자가 하는 거지요"라고 밝혔다.[* [[전설의 타이거즈]]에 출연한 김성한, 정회열이 김응용의 자율 야구에 대해 설명한 바 있다. 김성한은 김응룡의 지론은 "연습을 길게 하면 선수가 부상을 입는다"라고 말했고, 정회열은 해태가 자율 야구를 제일 먼저 도입한 팀이었다고 밝혔다.][* 더하여 한대화가 트레이드로 영입되었을 때 지병이 있는 한대화가 충분히 수면을 취하며 훈련할 수 있게 배려를 한 것도 김응룡 감독이었다.] 여기에는 원년과 달리 막강해진 마운드의 힘이 절대적이었다. 이상윤이 20승을 거두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거듭났고 기존의 김용남(13승)과 강만식(6승)도 호투하며 힘을 보탰다. 거기다 [[일본프로야구]] 출신의 [[김무종]]은 당시 국내의 어떤 포수들과도 비교될 수 없을 만큼 안정적이고 지능적인 투수 리드를 선보이면서 투수력의 전반적인 향상을 이끌어 냈다. 김일권으로 시작해 김성한, 김봉연, 김종모, 김준환 등으로 줄줄이 이어지는 타선의 힘은 한층 강해져 전기리그 1위를 기록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윘다. 투타가 완벽하게 조화가 이룬 해태는 [[1983년 한국시리즈|그해 한국시리즈]]에서 1승 2세이브를 따낸 이상윤과 5경기 8타점을 기록한 한국시리즈 MVP를 받은 김봉연의 활약으로 후기리그 우승팀인 [[MBC 청룡]]을 4승 1무로 일축하고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였다.[* 공교롭게도 당시 MBC 감독은 바로 전해 감독직에서 물러난 김동엽이었다. 그는 한국시리즈를 앞두고 한껏 복수심을 불태웠지만 [[아웅산 묘소 폭탄 테러]]로 인해 한국시리즈 개막이 약 1주 정도 연기되었고 그 와중에 터진 선수단 훈련 문제와 보너스 지급 문제로 인해 선수단의 결속력이 와해되면서 해태에게 속절없이 깨지고 만다.] 그러나 역사적인 첫 우승 이후에도 선수단에 대한 연봉 처우는 개선되지 않았고 결국 이에 대해 극도로 폭발한 선수단의 불만이 1984 시즌 내내 악재로 작용하면서[* 후술하게 되는 이른바 '[[해태 타이거즈 불고기 항명사건]]'이 1984 시즌 초에 발생하게 된다.] 그해 종합 순위 5위에 그쳤고[* 물론 그 와중에도 후기리그 우승을 두고 삼성, OB, 롯데와 경쟁을 하는 저력을 보여주긴 했다.] 1985년은 에이스 이상윤의 부상 공백으로 투수력에 애를 먹으면서 종합 3위에 머물게 된다.[* 1984년은 [[롯데 자이언츠]]가 [[최동원|위대한 거인의 별]]을 내세워 삼성을 격파해 [[1984년 한국시리즈|우승]]하였고, 1985년은 [[삼성 라이온즈]]가 지난번에 당한 것 땜에 빡쳤는지 [[1985년 전후기 통합우승|혼자 다 해먹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